본문 바로가기

읽다/리터러시

[독서후기] 먀살 맥루한 『미디어는 맛사지다』

출처 yes24

 

근래 리터러시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개인 혹은 집단의) 정체성이 미디어와 정보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접하는 매체와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렇게 검색을 하면서 찾게 된 책이 바로 맥루한의 『미디어는 마사지다』(1967년 최초발행)이다.

 

동네 도서관에서도 쉽게 빌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으로 대출했다.

 

책은 150쪽 남짓으로 얇으면서 소화해야 할 활자의 양도 많지 않은 편이다.

일반적인 책과 같은 (서사적이나 논리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미디어와 연관된 하위 주제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생각을

거친 파편처럼 불규칙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때로는 텍스트만으로 생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미지만으로 관념을 드러내기도 하며,

때로는 글자를 좌우로 또는 위아래로 뒤집어서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표지부터 이해하기 난해하다. (아래 참조)

 

출처 http://youlhwadang.co.kr/book/1427/

 

책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으로 쓰여 있어서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글을 읽는 내내 추상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 속에서 보편성을 포착해 내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예측하는 미래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은유'가 떠올랐다.

 

김용규는 『생각의 시대』에서 '은유는 유사성을 통해 '보편성'을,

비유사성을 통해 '창의성'을 드러내는 천재적인 생각의 도구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레이코프와 존슨이 말했던 1차적 은유와 2차적 은유에 대해 설명한다.

 

1차적 은유는 언어와 제스처, 행동 사이에 드러나는 연결고리를 뜻한다.

가령 사람들은 기쁜 순간을 몸으로 표현할 때

눈이나 입 등의 감각 기관들을 개방하고,

손과 팔을 벌리고 위를 향하게 하는 등 공통적인 표현 양상을 갖는다.

'기쁨=개방' 또는 '기쁨=상승'과 같은 연결 고리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이 1차적 은유이다.

 

2차적 은유는 우리가 흔히 국어 시간에 배운, 수사(修辭)적 은유다.

'그 목소리는 유리구슬이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 보면,

그 목소리와 유리구슬은 서로 다른 실체를 갖지만

유리구슬처럼 아름답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2차적 은유는 이를 언어로 꿰어놓은 형식이다.

화자가 애초에 표적으로 삼았던 최초의 공통점은 아름다움이었을지라도

의미는 투명한, 둥근, 차가운 등 다양한 이미지로 확장되거나 파생될 수 있다.

 

다시 『미디어는 맛사지다』로 돌아와서

맥루한이 의미를 전하는 방식에서도 위에서 말한 은유가 느껴지는 구절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몇 문장만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가족의 범위는 확대되었다. 전자미디어, 즉 영화-통신위성-비행기 미디어로 인한 정보의 세계적 공급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성격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성실하지만 서툰 두 전문가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없게끔 되었다. 이제 전세계가 하나의 현자인 셈이다. (14쪽)

② 텔레비전에서는 이미지가 시청자 쪽으로 투사된다. 당신은 스크린이다. 이미지는 당신을 둘러싼다. 당신은 소멸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본질, 동양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역원근법을 창조한다. (125쪽)

③ 박물관은 인류가치의 척도, 문화적 혈액은행의 창고가 되었다. (137쪽)

 

①에서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를 어머니와 아버지로 은유하고,

확장되어 가는 미디어가 개인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을 전세계로 은유했다.

 

②에서는 텔레비전이 송출하는 화면이 닿는 시청자를 스크린으로 은유하고, '스크린=시청자'의 연결에서 시청자는 수동성을 지닌 객체로 치환된다.

'시청자=소멸점'의 구도에서 미디어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주체성이 사라지는 지점으로 연결된다.

 

③의 '박물관=문화적 혈액은행'이라는 은유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혈액은행'이라는 표현 자체가 정체성을 상징하면서 고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어서 배우고 싶은 문장 표현 방식이었다.

 

출처『미디어는 맛사지다』 152~153쪽

 

출처 『미디어는 맛사지다』 154~155쪽

 

저자는 위 그림으로 책을 매조지한다.

벌레인지 사람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기괴한 생물이 아무개에게,

"그럼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다.

그러자 물음을 받은 그 아무개가

"나는, 바로 지금 내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내가 누구였는지 알았읍니다만,

그때 이후로 나는 몇 차례나 변화를 겪어 왔는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은유가 포함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기괴한 생물=(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미디어'로,

'아무개=(익명성을 지닌 대중들 속의) 시청자'로 연결이 되었다고 봤다.

그리고 그 시청자가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겪는 혼란도,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매체를 통제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 놓여 있는 현실을 표현한 역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시청자는 매체가 물음을 던질 때만 스스로를 자각하고 응답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표현했다.

(이 부분은 쌍방향화, 다원화된 매체 구조를 고려하면 현재와 맞지는 않지만,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가 1967년임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다.)

 

매체에 대해서 알아볼수록 철학적인 문제와 엮여 있고, 현실 정치와도 긴밀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갈수록 미디어 생태계가 다변화되고 있는 현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회와 학교에서도 관심 갖고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