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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년제/학부모로서

[20250305] 왜 약을 안 먹고 갔니

3월 5일(수) 왜 약을 안 먹고 갔니

 

3월은 봄이라지만 아직은 날이 차다.

지난 주말 내내 놀이터에서 놀고 들어온 두 녀석 모두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내는 일찍 출근하고,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은 나의 몫이다.

아내는 아이들 학교 보내기 전에, 감기 약을 먹이라고 내게 당부했었다.

 

두 녀석 모두 학년 초라 그런지 제법 군기가 바짝 들어서,

아이들은 급하게 밥 먹고 양치를 마친 후, 학교로 곧장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아이들이 놓고 간 약병이 보였다.

처음에는 약 한번 안 먹으면 어떤가 싶어 그냥 둘까 싶기도 했지만,

기침과 콧물을 달고 지내는 녀석들을 생각하면 약을 먹이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시계는 8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바로 학교로 가면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 전에,

두 녀석에게 모두 약을 먹일 수 있겠지 싶어 서둘러 학교로 출발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속으로는 잔잔한 갈등이 일었다.

처음에는 나도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담임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초대 받아서 가는 일도 아니고, 개인적인 일로 아이를 만나러 간다는 점이 괜히 신경쓰였다.

게다가 첫째의 담임은 어제도 만나지 않았던가.

 

먼저 2층에 있는 1학년 교실로 갔다.

어수선한 교실에서 둘째를 불러내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둘째도 반가운 기색보다는 '아빠가 왜 학교에 왔어?' 하는 표정으로 약만 받아먹고 조용히 교실로 들어갔다.

이제 3층의 3학년 교실로 갈 차례다.

 

3학년은 교실은 비교적 정돈된 분위기였다.

어제 담임을 마주친 일이 떠오르면서, 오늘은 조용히 미션만 성공하고 싶었다.

작은 소리로 복도를 지나던 같은 반 친구에게 첫째 좀 불러 달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담임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교실 밖에 어떤 아저씨가 있어요."

 

결국 그 아저씨는 오늘도 담임과 만나고 말았다.

유난스런 부모로 비치지 않을까 싶은 우려가 밀려왔다.

 

이러저러 해서 약을 전해주러 왔노라고 담임에게 말했다.

나는 약을 전해주기만 하면 다른 점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괜히 담임을 번거롭게 하면 내가, 우리 아이가 더 도드라져 보일까봐.

다른 아이들의 부모처럼,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로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림자가 돋보이면 교육에 방해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특유의 사무적인 얼굴로,

내 용건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을 뱉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할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일종의 습관처럼 들리기도,

서둘러 내가 떠나주기를 바라는 인사말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누구도 나를 쫓아낸 사람은 없었지만,

학교 안에 머무르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